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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양후열전

양후열전(穰侯列傳):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한 자

“한 사람의 유세로 몸이 꺾이고 권세를 빼앗기며 근심 속에 죽었다.” 사마천, 태사공자서


권력은 핏줄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306년, 진(秦)나라 무왕(武王)이 갑작스레 죽었다.

후사가 없었다.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즉각 시작됐다. 왕족들이 서로 물고 뜯는 혼란 속에서, 단 한 사람이 냉정하게 판세를 읽고 움직였다.

위염(魏冉)이었다.

그는 선태후(宣太後)의 이복 오빠였다. 선태후는 훗날 소왕(昭王)의 어머니가 될 여인. 위염은 그 핏줄을 등에 업고 혼란을 제압했다. 반란을 일으킨 계군(季君)의 무리를 도륙했고, 무왕의 왕후를 위(魏)나라로 추방했으며, 소왕의 형제들 중 불순한 자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진나라 전체가 그의 이름 앞에 몸을 낮췄다.

소왕은 어렸다. 태후가 실권을 쥐었고, 위염이 정치를 맡았다. 조카가 왕이고, 누이가 태후였다. 위염의 시대가 열렸다.


백기(白起)라는 검을 손에 쥐다

위염의 진짜 힘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에 있었다.

소왕 14년, 그는 한 장수를 발탁한다. 이름은 백기(白起). 당시엔 무명에 가까웠다.

위염은 그를 이궐(伊闕) 전투에 내보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한(韓)과 위(魏)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수급 24만을 베었다. 위나라 장수 공손희(公孫喜)를 생포했다. 이듬해에는 초(楚)나라의 완(宛)과 엽(葉)을 빼앗았다.

백기는 위염이 만든 검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웠다.

수년 뒤, 백기는 초나라의 수도 영(郢)마저 함락시킨다. 진나라는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백기는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위염은 그를 발탁한 공로로 다시 봉지를 더 받았다.

위염의 부는 왕실을 능가했다.


대량(大梁) 성벽 앞에서

소왕 32년. 위염은 상국(相國)의 자리에 앉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쳤다.

망묘(芒卯)를 몰아내고 북택(北宅)을 돌파했다. 그리고 대량(大梁)을 포위했다.

대량은 위나라의 수도였다.

성문이 닫혔다. 장기전의 냄새가 났다. 바로 그때, 위나라 대부 수가(須賈)가 위염의 막사를 찾아왔다.

그는 말했다.

“옛날 조(趙)나라가 포위당했을 때 땅을 내주지 않았고, 결국 땅을 되찾았습니다. 위(衛)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면 송(宋)과 중산(中山)은 쳐들어올 때마다 땅을 잘라주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수가의 논리는 치밀했다.

초(楚)와 조(趙)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소규모 할양으로 타협하라는 것이었다. 대량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면, 지금껏 쌓아온 공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위염 자신의 봉지인 도(陶)가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위염은 잠시 생각했다.

“옳다.”

그는 포위를 풀었다.

천하를 쥔 상국이, 말 한마디에 군대를 물렸다. 어떤 이는 이것을 유연함이라 불렀고, 어떤 이는 탐욕이라 불렀다. 위염이 대량 포위를 고집하지 않은 건 인의(仁義)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봉지 도(陶)를 지키려는 계산이었다.


도(陶), 그 탐욕의 이름

여기서 한 가지를 직시해야 한다.

위염의 외교와 전략은 언제나 도(陶) 봉지를 향해 있었다.

도는 진나라 영토와 멀리 떨어진 위나라와 제나라 사이의 땅이었다. 사방이 적국에 둘러싸인 그 땅을 위염은 탐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의 전쟁과 외교를 이용해 도의 영역을 넓혀갔다.

소왕 36년, 그는 또 한 번 제나라의 강(剛)과 수(壽)를 공격하려 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도읍의 영토를 더 넓히기 위해서였다.

진나라의 이익이 아니었다. 위염 개인의 영토 확장이었다.

이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범수(范雎), 한 장의 편지

위나라 출신의 나그네 범수(范雎). 그는 장록선생(張祿先生)이라는 가명으로 진나라에 잠입했다.

그는 위염의 전략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삼진(三晉)을 건너뛰어 제나라를 치는 건 어리석습니다. 멀리 있는 나라를 치면, 얻어도 지키지 못합니다. 가까운 나라부터 쳐야 합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멀리 있는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라.

소왕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범수는 더 나아갔다. 소왕에게 속삭였다.

“선태후가 나라를 전단하고 있습니다. 위염이 제후들 사이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경양군과 고릉군 등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그들의 부는 왕실을 넘어섰습니다.”

소왕이 눈을 떴다.

한 명의 유세객이 수십 년을 쌓아온 권력의 탑을 흔들었다.


함곡관(函谷關) 밖으로

소왕은 결단했다.

위염을 상국직에서 해임했다. 경양군, 고릉군을 비롯한 태후의 일족 모두를 관중(關中) 밖으로 내보내 봉지로 돌아가게 했다.

위염은 함곡관을 나섰다.

짐수레가 천 대를 넘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행렬이었다.

그는 봉지 도(陶)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혔다. 얼마 뒤, 진나라는 도를 회수해 군현으로 편입시켰다.

그토록 집착했던 땅은 결국 그의 것이 아니었다.


사마천이 남긴 한 마디

양후는 소왕의 친외삼촌이었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제후를 약하게 만들고, 한때 천하에 황제를 칭하여 천하가 모두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것은 양후의 공이었다. 그러나 부귀가 극에 달하자, 한 사람의 유세로 몸이 꺾이고 권세를 빼앗기며 근심 속에 죽었으니, 하물며 객지를 떠도는 신하들이야 오죽하랴.

사마천은 위염을 평가할 때 공(功)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공이 컸기에 더 비극적이라고 봤다.

권력의 중심에 너무 오래 있었던 자. 왕보다 더 부유했던 자. 나라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구분하지 못했던 자.

그게 위염이었다.


조직 안에서 위염을 읽다

너무 오래된 공신은 결국 쳐낼 대상이 된다.

위염의 몰락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강해서였다. 조직에서 당신의 부(富)와 영향력이 리더를 초과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위험 구역에 들어선 것이다.

범수 한 명이 흔든 것이 아니다. 소왕의 마음속에 이미 씨앗이 있었고, 범수는 그것에 물을 준 것뿐이다.

개인의 이익과 조직의 이익이 겹칠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어긋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면 위염의 길을 걷게 된다.

한 사람의 유세로 수십 년이 무너진다. 조직 안에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은 없다. 그 자리가 높을수록, 낙폭은 더 크다.

위염의 진짜 실수는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