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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백기왕전열전

백기열전(白起列傳): 전쟁의 신, 그 칼날의 끝

“나는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백기(白起), 자결 직전의 독백


아무도 몰랐던 이름

기원전 294년, 진(秦)나라 소왕(昭王) 13년.

백기(白起)라는 이름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다.

좌서장(左庶長)이라는 중간 직책. 한(韓)나라 신성(新城)을 공격하는 임무. 그것이 전부였다. 사마천도 이 시기를 단 한 줄로 처리했다.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해, 세상이 달라졌다.

이궐(伊闕). 한나라와 위(魏)나라의 연합군이 집결한 그 땅에서 백기는 전투를 시작했다.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서로의 눈치만 봤다. 누가 먼저 싸울 것인가. 누가 피해를 감수할 것인가. 동맹의 균열은 개전 전부터 시작됐다.

백기는 그 균열을 정확히 찔렀다.

수급 24만. 위나라 장수 공손희(公孫喜)를 생포. 성 다섯 개 함락.

단 한 번의 전투였다.

백기는 좌경(左更)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전쟁 기계

이후 10년간의 기록은 숫자로 가득하다.

위나라 공략, 크고 작은 성 61개 함락. 조(趙)나라 광랑성(光狼城) 함락. 그리고 초(楚)나라.

소왕 28년, 백기는 초나라를 향해 군대를 몰았다.

언(鄢)을 쳤다. 등(鄧)을 비롯한 다섯 개 성을 무너뜨렸다. 이듬해에는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다. 이릉(夷陵)을 불태웠다. 동쪽으로 경릉(竟陵)까지 진격했다.

초왕은 수도를 버리고 달아났다.

진나라는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백기는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나라 하나를 사실상 해체한 공이었다.

그는 계속 싸웠다.

화양(華陽)에서 위나라와 조나라를 동시에 격파하고 수급 13만을 베었다.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의 병사 2만을 황하에 수장시켰다. 한나라 형성(陘城)에서 또 수급 5만.

숫자가 쌓일수록 그의 이름은 무거워졌다.

사람들은 그를 전쟁의 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신은 살육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장평(長平), 역사가 멈춘 자리

소왕 45년, 사건의 씨앗이 심어졌다.

진나라가 한나라의 야왕(野王)을 쳤다. 야왕이 무너지자 상당(上黨) 지역이 고립됐다. 한나라 본토와의 길이 끊겼다.

상당 태수 풍정(馮亭)은 계산했다.

“어차피 한나라는 우리를 지킬 수 없다. 진나라에 넘겨주느니, 조나라에 바치자. 조나라가 받으면 진나라가 분노해 조나라를 칠 것이다. 조나라가 피해를 입으면 한나라와 연대할 것이다. 한조(韓趙)가 하나가 되면 진나라를 막을 수 있다.”

계략이었다. 그러나 조나라는 이 뜨거운 감자를 덥석 집어들었다.

평원군(平原君)이 말했다. “공짜로 한 개 군을 얻는데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평양군(平陽君)이 말렸다. “화가 얻는 것보다 크다.”

조나라는 평원군의 말을 따랐다. 풍정에게 화양군(華陽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진나라의 분노가 움직였다.

소왕 47년, 진나라는 좌서장 왕흘(王齕)을 보내 상당을 빼앗았다. 상당 백성들은 조나라로 도망쳤다. 조나라 장수 염파(廉頗)가 군대를 이끌고 장평(長平)에 진을 쳤다.

전쟁이 시작됐다.


염파의 수비, 그리고 반간계

염파는 노련했다.

초반에 몇 차례 패배하자, 그는 즉각 전략을 바꿨다. 성벽을 높이 쌓고 수비를 굳혔다. 진나라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었다.

이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진나라의 보급선은 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나라에게 불리했다. 조나라가 버티기만 한다면 판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왕(趙王)은 버티지 못했다.

염파가 싸우지 않는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왕은 초조했다. 그때 진나라에서 소문을 퍼뜨렸다.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마복자(馬服子) 조괄(趙括)이다. 염파 따위는 곧 항복할 것이다.”

반간계(反間計)였다. 천금을 뿌린 공작이었다.

조왕은 미끼를 물었다.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장수로 임명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임명 소식을 듣고 직접 조왕에게 청원했다.

“제발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그 아버지 조사(趙奢)는 장수가 되면 사비를 털어 부하를 먹였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은 녹봉을 받으면 집에 쌓아놓기 바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다릅니다.”

조왕은 듣지 않았다.

한편 진나라는 비밀리에 백기를 상장군으로 임명했다. 군중에 엄명을 내렸다.

백기가 장수라는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자는 참한다.


46일의 포위

조괄이 도착했다.

그는 즉각 공세로 전환했다. 진나라 군대가 패주했다. 조괄은 추격했다. 승세를 몰았다.

그것이 함정이었다.

백기는 2만 5천의 기습 병력을 미리 배치해두었다.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끊었다. 5천의 기병이 조나라의 진영과 본대 사이를 갈라놓았다. 조나라 군대는 둘로 쪼개졌다.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됐다.

조괄은 성벽을 쌓고 수비로 전환했다. 구원을 기다렸다.

소왕은 직접 하내(河內)로 달려갔다. 백성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15세 이상의 남자를 모두 징집해 장평으로 보냈다. 조나라의 구원군과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9월이 됐다.

조나라 병사들은 46일째 먹지 못했다. 내부에서 서로를 죽여 먹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괄이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포위를 뚫으려 했다. 네 차례 돌격. 모두 실패했다. 다섯 번째 돌격에서 조괄은 진나라 군대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40만이 항복했다.


40만의 처분

백기 앞에 40만 명의 포로가 있었다.

그는 계산했다.

“상당 백성들은 진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조나라로 넘어갔다. 조나라 병사들은 반복해서 배신할 것이다. 전부 죽이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난을 일으킨다.”

속임수를 써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어린아이 240명만 살려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전후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자가 45만 명.

이 숫자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였다. 조나라는 그날 이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천하가 떨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백기의 운명에도 씨앗을 심었다.


응후(應侯)의 계산

장평 다음해, 진나라는 상당을 평정한 뒤 한단(邯鄲)을 향해 진격하려 했다.

바로 그때, 조나라 사신 소대(蘇代)가 진나라 재상 응후(應侯) 범수를 찾아갔다. 수레 가득 뇌물을 실어서.

소대가 물었다.

“무안군이 조괄을 사로잡았지요?” “그렇소.” “그러면 이제 한단을 포위하겠지요?” “그렇소.”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이 왕중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될 것입니다. 장군은 그 아래에 설 수 있겠습니까?”

범수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소대는 계속했다. 설령 조나라를 멸망시켜도 그 땅은 연나라,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로 흩어지고 진나라가 얻는 것은 적다고 했다. 지금 할양으로 화친하고 무안군의 공을 더 키우지 말라고 속삭였다.

범수는 소왕에게 건의했다.

“군사들이 지쳐 있습니다. 화친하여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

소왕이 들었다.

정월, 모든 군대가 철수했다.

백기가 이 소식을 들었다. 사마천은 결과만 기록했다.

“이로부터 백기와 응후 사이에 틈이 생겼다.”


거절, 그리고 추방

그해 9월, 진나라가 다시 군대를 일으켜 왕릉(王陵)을 보내 한단을 공격했다. 이때 백기는 병중이었다.

왕릉은 고전했다. 진나라가 병력을 추가로 보냈지만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소왕이 백기에게 대신 나가라고 명했다.

백기는 말했다.

“한단은 결코 쉽게 공략할 수 없습니다. 제후들의 구원군이 날마다 오고 있습니다. 장평에서 이겼지만 우리 병사도 절반 이상 죽었고 나라 안이 텅 비어 있습니다. 먼 곳까지 산하를 건너 남의 도읍을 다투는 동안 조나라가 안에서 응하고 제후들이 밖에서 공격하면 진나라 군대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불가합니다.”

소왕이 직접 명했다. 백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응후가 찾아가 청했다. 백기는 끝내 거절하며 병을 핑계로 버텼다.

소왕은 왕흘(王齕)을 보냈다. 8개월을 포위했지만 한단은 무너지지 않았다. 초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이 수십만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진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기가 말했다.

“진나라가 내 계책을 듣지 않더니, 이제 어떻게 됐는가!”

소왕이 이 말을 들었다.

분노했다.

강제로 백기를 일으키려 했다. 백기는 병이 심하다고 버텼다. 응후가 다시 청했다. 백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소왕은 백기의 직위를 박탈했다. 사졸(士伍)로 강등해 음밀(陰密)로 추방했다.

백기는 병 때문에 즉각 떠나지 못했다. 석 달이 지났다.

제후들의 공격이 격렬해졌다. 진나라 군대가 계속 밀렸다. 사신이 날마다 왔다.

소왕은 사람을 보내 백기를 함양(鹹陽) 밖으로 내보냈다.


두우(杜郵)에서의 검

백기는 함양의 서문을 나섰다.

10리를 걸었다. 두우(杜郵)에 이르렀다.

소왕이 응후 및 신하들과 의논했다.

“백기가 쫓겨나면서도 여전히 불복하는 기색이 있고 불만스러운 말을 남기고 있다.”

소왕은 사자를 보내 검 한 자루를 내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이었다.

백기는 검을 들었다. 막 목을 베려던 순간, 말했다.

“나는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장평 전투에서 수십만 명의 항복한 조나라 병사를 속여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이것만으로도 죽기에 충분하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왕 50년 11월이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불쌍히 여겼다. 마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사마천이 본 백기

“백기는 적의 형세를 헤아리고 변화에 맞춰 기이한 전술을 끝없이 펼쳐 천하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응후의 화를 막아내지 못했다.”

탁월한 군사적 천재가 정치적 무능으로 무너졌다는 평이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다.

백기는 한단 공격이 실패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거절했다. 결과는 그의 예측대로였다. 그는 옳았다.

그러나 옳은 것과 살아남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조직에서 백기를 읽다

실력이 최고여도 정치를 모르면 검이 날아온다.

백기의 실패는 전장에서 일어난 게 아니었다. 한단 거절 이후, 그는 소왕과 범수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읽지 못했다. 조직 안에서 “내가 옳다”는 확신은 종종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된다.

상사의 결정이 틀렸을 때, 옳음을 증명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백기는 예측이 적중했지만 그 적중이 오히려 그를 죽였다. 조직에서는 결과가 맞는 것보다 윗사람이 틀렸을 때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또한 범수의 질투를 백기는 끝내 관리하지 못했다. 탁월한 성과는 동료의 시기를 부른다. 그 시기가 쌓이면, 결정적인 순간에 한 명의 입이 당신의 수십 년을 무너뜨린다.

검은 전장에서만 날아오지 않는다.

왕전열전(王翦列傳): 살아남은 자의 기술

“진왕은 성격이 거칠고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나에게 맡긴 만큼, 내가 땅과 집을 청하지 않으면 왕은 나를 의심할 것이다.” — 왕전(王翦)


두 장수, 두 운명

백기(白起)는 죽었다.

두우(杜郵)에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천하를 진동시킨 전쟁의 신이 검 한 자루를 받아들고 홀로 끝을 맞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또 한 명의 진나라 장수가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

왕전(王翦).

그는 백기와 같은 나라를 섬겼다.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이겼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왕전은 살았다. 봉지를 받았다. 자식에게 공을 물려줬다.

두 사람의 차이는 전술이 아니었다.

처신이었다.


시작은 조용했다

진시황(秦始皇) 11년.

왕전은 조나라 알여(閼與)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아홉 개 성을 함락시켰다. 깔끔한 출발이었지만 극적이진 않았다.

진시황 18년, 그에게 다시 조나라 공략 임무가 주어졌다.

1년이 넘는 싸움 끝에 조나라가 무너졌다. 조왕이 항복했다. 조나라 전역이 군현으로 편입됐다.

이어서 연나라.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진시황은 즉각 왕전을 보냈다. 연왕 희(喜)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왕전은 연나라 수도 계(薊)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조나라, 연나라. 하나씩 지도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진짜 시험은 아직 남아 있었다.


20만이냐, 60만이냐

초(楚)나라였다.

진시황은 젊고 패기 넘치는 장수 이신(李信)을 주목했다. 이신은 일찍이 수천 명의 병력만으로 연나라 태자 단을 추격해 사로잡은 인물이었다. 진시황은 그를 과감하고 용맹하다고 평가했다.

진시황이 이신에게 물었다.

“초나라를 공략하려면 얼마나 필요한가?”

이신이 답했다.

“20만이면 충분합니다.”

진시황이 왕전에게 물었다.

왕전이 답했다.

“60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진시황이 웃었다.

“왕 장군은 늙었구려. 어찌 이리 겁이 많소! 이 장군이야말로 과감하고 옳소.”

왕전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빈양(頻陽)으로 돌아갔다.


이신의 패배

진시황은 이신과 몽념(蒙恬)에게 20만 병력을 주어 초나라를 쳤다.

초반은 순조로웠다. 이신이 평여(平與)를 공격하고 몽념이 침(寢)을 쳐서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이신은 언(鄢)과 영(郢)을 공격해 격파했다.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 몽념과 성보(城父)에서 합류하려 했다.

그때 초나라가 움직였다.

초나라 군대가 이신을 사흘 밤낮으로 추격했다. 쉬지 않고 따라붙었다. 이신의 두 진영을 무너뜨렸다. 도위(都尉) 일곱 명을 죽였다. 진나라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진시황이 이 소식을 들었다.

크게 분노했다.

그는 직접 수레를 몰아 빈양으로 달려갔다. 왕전에게 찾아가 머리를 숙였다.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이신이 진나라 군대를 욕보였소. 이제 초나라 군대가 날마다 서쪽으로 진격해 오고 있으니, 장군께서 비록 병중이시더라도 어찌 과인을 버릴 수 있겠소!”

왕전이 사양했다.

“노신은 병들고 정신이 혼미하오니 대왕께서 다른 현명한 장수를 택하십시오.”

진시황이 거듭 사과했다.

“이미 지난 일이오.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께서 기어이 신을 쓰시겠다면, 60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진시황이 말했다.

“장군의 계책을 따르겠소.”


청탁의 기술

왕전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발했다.

진시황이 직접 파상(灞上)까지 배웅했다.

왕전이 출발하면서 아름다운 밭과 집과 원림(園林)과 연못을 많이 청했다.

진시황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장군이 출발했으니 무엇이 가난함을 걱정하시오?”

왕전이 답했다.

“대왕의 장수가 되어도 결국 봉후(封侯)를 받지 못한다고 하니, 대왕께서 신을 쓰실 때를 틈타 신도 제때에 원림과 연못을 자손의 업으로 삼고자 청하는 것입니다.”

진시황이 크게 웃었다.

왕전이 함곡관(函谷關)에 이른 뒤에도, 사자를 다섯 번이나 보내 좋은 밭을 계속 청했다.

누군가 말했다.

“장군께서 청탁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왕전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 진왕은 성격이 거칠고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진나라의 모든 병력을 나에게 맡긴 만큼, 내가 밭과 집을 청하지 않으면 진왕은 나를 의심할 것이다. 오히려 재물에 욕심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안전하다.”


기다리는 장수

왕전이 초나라에 도착했다.

초나라는 왕전이 대군을 이끌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맞섰다.

왕전은 싸우지 않았다.

성벽을 굳게 쌓고 수비만 했다. 초나라 군대가 수차례 도발했다. 왕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병사들을 잘 먹이고 쉬게 했다. 직접 병사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어느 날 왕전이 물었다.

“요즘 군중에서 무슨 놀이를 하고 있나?”

“투석(投石)과 도약(超距) 경기를 합니다.”

왕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병사들을 쓸 수 있겠다.”

기다림이 끝났다.

초나라 군대가 지쳐서 동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왕전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추격했다. 정예 병사를 앞세워 돌격시켰다. 기남(蘄南)에서 초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항연(項燕) 장군을 죽였다. 초나라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진나라는 승세를 몰아 초나라 성읍들을 하나씩 평정해 나갔다.

1년 뒤, 초왕 부추(負芻)를 사로잡았다. 초나라 전역이 군현으로 편입됐다.

왕전은 이어서 남월(南越)의 군주들까지 굴복시켰다.


왕씨 일가의 시대

왕전의 아들 왕분(王賁)도 아버지에 뒤지지 않았다.

이신과 함께 연나라와 제나라를 쳐서 평정했다.

진시황 26년, 천하가 하나로 합쳐졌다.

왕씨(王氏)와 몽씨(蒙氏)의 공이 가장 컸고, 그 이름은 후세에 전해졌다.

왕전은 싸워서 이겼고, 받아야 할 것을 받았으며,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났다.

그는 살았다.


손자의 패배, 그리고 사마천의 경고

그러나 사마천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진시황이 죽고 진이세(秦二世)의 시대가 왔다. 왕전과 왕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진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절, 왕전의 손자 왕리(王離)가 조나라를 치라는 명을 받았다. 거록(鉅鹿) 성을 포위했다.

누군가 말했다.

“왕리는 진나라의 명장이다. 강한 진나라 병력을 이끌고 새로 세워진 조나라를 치니 반드시 함락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삼대를 장수로 지낸 자는 반드시 패한다. 삼대 동안 죽이고 정벌한 것이 많으니, 그 후손이 그 불길한 결과를 받는 것이다. 왕리는 이미 삼대 장수다.”

얼마 뒤, 항우(項羽)가 조나라를 구원하러 와 진나라 군대를 쳤다.

왕리는 사로잡혔다.


사마천이 남긴 말

“속담에 ‘자에도 짧은 부분이 있고, 촌에도 긴 부분이 있다’고 한다. 백기는 적의 형세를 헤아리고 기이한 전술을 끝없이 펼쳐 천하를 진동시켰지만 응후의 화를 막지 못했다. 왕전은 진나라 장수로 여섯 나라를 무찔렀으나 진나라가 덕을 쌓아 근본을 튼튼히 하도록 보좌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영합해 용납을 구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손자 왕리가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각자 짧은 점이 있었다.”

사마천의 평은 냉정하다.

왕전을 영웅으로 보지 않았다.

왕전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살아남음의 방식이 문제였다. 진시황의 폭정을 막지 못했다. 덕이 아니라 전공으로만 존재했다. 그래서 삼대가 지나자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게 말한다.

백기는 옳았지만 죽었다. 왕전은 구차했지만 살았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직에서 왕전을 읽다

살아남는 것도 전략이다. 단, 대가는 있다.

왕전이 밭을 청한 것은 비굴함이 아니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한 계산이었다. 그는 최고 권력자의 심리를 정확히 읽었다. “나는 재물에 욕심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신호가, “나는 왕위를 탐내지 않습니다”라는 보증이 됐다.

조직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사람은 의심받는다. 그 의심을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작은 약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된다.

왕전은 또 기다릴 줄 알았다. 초나라 군대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병사들을 쉬게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적이 지쳤을 때 움직였다. 이것은 전장의 전술이기도 하지만 조직 생활의 전술이기도 하다. 섣불리 나서지 않고 체력을 비축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하는 것.

단, 사마천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구차하게 영합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유효하다. 그러나 그 방식이 습관이 되면 조직의 방향을 바로잡는 목소리를 영영 잃게 된다. 왕전이 살아남은 방식은 결국 손자 왕리의 패배로 되돌아왔다.

처신의 기술은 생존을 보장하지만, 가문의 품격은 보장하지 않는다.